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티브 칼튼 (문단 편집) ===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 || [[파일:external/24.media.tumblr.com/tumblr_lwaw9d23h51qzz33qo1_1280.jpg|width=100%]] || 칼튼의 트레이드가 실수였다는 것은 트레이드가 된 바로 다음 해인 1972년에 입증되었다. 칼튼은 1972년 41경기에서 무려 '''346.1'''이닝을 던지며 30완투/8완봉 27승 10패 1.97ERA/182ERA+ 2.01FIP 87BB/310K를 찍으며 [[사이 영 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시즌 칼튼은 무려 '''11.1이라는 당시 역대 1위의 투수 단일 시즌 fWAR'''을 기록했다.[* 1888년 실버 킹이 585.2이닝을 던지며 11.1을 기록한 적이 있다.][* 이 기록은 1999년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겨우 213이닝으로 11.6을 찍으며 경신했다. 단일 시즌 fWAR 11이 넘는 건 이 3명뿐이다.] 이 해에 팀이 거둔 성적은 고작 59승뿐이었고 그리고 그는 30번의 완투를 했다.[* 참고로 칼튼을 뺀 나머지 투수들이 기록한 평균자책은 4점대. 역대 단일 시즌의 한 선수가 팀 내의 전체 승에서 공헌한 최고 비율 기록.] 세인트루이스 시절부터 팔꿈치가 좋지 않았고, 심지어는 슬라이더 제구가 다시 흐트러지는 등 3년 정도 고생했지만, 1977년 23승 10패 평균자책 2.64로 부활에 성공하며 다시 [[사이 영 상]]을 득템. 그리고 1980년에 다시 24승 9패로 역시 사이 영 상을 또 다시 득템, 마지막으로 1982년에 23승을 거두면서 본인 커리어의 마지막 사이 영 상이자 통산 4번째 사이 영 상을 획득했다. 1980년의 경우 304이닝을 던졌는데, 이후로 점점 투수들의 분업화와 5인 로테이션 체제가 정착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역사상 최후의 300이닝 돌파를 달성한 선수로 기록에 남았다. 정리하자면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칼튼이 리그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탈삼진 능력이 빼어나서 필라델피아에서 다섯 번의 탈심진왕에 올랐다. 선수 생활 후반부에는 [[놀란 라이언]]과 [[게일로드 페리]]와 치열한 통산 탈삼진왕 경쟁을 펼치며 전설적인 대투수 [[월터 존슨]]의 기록을 넘었다. 이 치열한 경쟁은 먼저 [[게일로드 페리]]가 떨어져 나가고, 라이언과 칼튼의 대결이 되었는데, 최후의 승자는 칼튼이 은퇴한 후로도 5년을 더 뛰며 5,000 탈삼진을 넘긴 라이언. 칼튼은 대신 왼손 투수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가졌다가 이 또한 [[랜디 존슨]]에 의해 깨졌다. 그가 미친듯이 팔 빠져라 던지는 사이 팀 전력이 좋아지면서 마침내 필라델피아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영광의 세월을 보낸다. 이 시기 6번의 PO에 나가는데, 칼튼은 모두 등판했다. 초기에는 PO에서 다소 부진했지만, 점차 이 또한 나아지면서 1980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사상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한 몫 했다. 아쉽게도 필라델피아에서 은퇴하지는 못했는데, 말년에 부진하자 필라델피아가 가차없이 방출해 버린 것. 그 뒤 여러 팀을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1988년 조용히 은퇴를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